‘블랙리스트’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노조 탄압의 증거다
지난 2017년 여름, MBC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보도국 카메라 기자 65명의 성향을 분류해 등급을 매긴 이른바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확인됐던 것이다. 놀랍게도 분류의 기준은 ‘친노조’ 여부였다. 최하인 4등급(‘X’로 분류)은 ‘파업 주도 계층’, 바로 위인 3등급(‘△’로 분류)은 ‘노조 영향력에 있는 회색분자’로 구분됐는데, 실제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본업인 영상기자 업무를 박탈당하고 보도부문 밖으로 밀려났거나, 승진인사에서 합당한 이유 없이 배제됐다. 반면 이른바 최상위 등급은 노동조합을 탈퇴한 뒤, 주요 출입처에 배치되거나 승진됐다. 이 모욕적인 ‘블랙리스트’ 문건은 적폐 시절 MBC 안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됐던 노동조합 탄압의 결정적 증거였고, 또 다른 파업 투쟁의 도화선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 문건의 작성자 권 모씨에 대한 해고가 무효라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사내 질서를 문란케 한 권 씨에 대한 해고처분이 정당하다고 봤던 1심 판결과 달리 2심 판결은 회사의 복무 질서를 위반했다는 점만 징계사유로 인정했을 뿐, 명예훼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건 맞지만, 일부 집단에서만 공유돼 법리상 모욕·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MBC본부가 체결한 단체협약에 따라 권 씨는 곧 다시 회사에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조합은 이번 2심 판결에 아쉬움을 지울 수 없으며, 이 사건에 대해서도 분명히 해 둘 말이 있다.
우선, 권 씨의 블랙리스트는 무엇보다 공정방송을 지키기 위해 자유와 독립성이 생명인 언론사에서 만들어져선 안 될 것이었다. 언론자유를 저해한 악질적인 행위였음은 물론이고, 구성원과 조합에 크나큰 해악을 미친 사건이었다. 권 씨는 동료 기자 65명을 자의적이고 악의적인 방식으로 분류하고 등급을 매겼다. 아무런 근거 없이 ‘의욕상실’, ‘무능과 태만’, ‘존재감 없는 인물’ 등 모욕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아직도 블랙리스트의 피해자들은 당시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심 재판부는 블랙리스트 작성을 개인의 일탈 행위로 보면서, 오히려 권 씨가 동료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기술했다. 백번 양보해도 이건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꾼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블랙리스트 문건은 권 씨 혼자 작성하고 혼자 보관만 한 문건이 아니었다. 이 문건은 당시 ‘회사 정책에 충성하는’ 이들에게 전달됐다. 단지 외부에 들키지 않았을 뿐, 사실상 특정 집단 안에서 블랙리스트는 공유되고 있던 셈이다. 그 문건이 분류한 대로 친노조 성향인 직원들은 ‘유배’되거나, 주요 부서에서 쫓겨났다. 적폐 경영진 시기 기자, PD, 아나운서 등 MBC내 모든 직종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권 씨의 블랙리스트도 조합과 조합원들을 탄압하기 위해, 경영진이 저지른 수많은 불법행위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일개 사원 신분이던 권 씨는 동료선후배들의 ‘인사이동안’을 작성해 부국장급 인사권자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정상적인 조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 같은 ‘월권’이야 말로 당시 노동조합 탄압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년간 MBC에서 자행됐던 부당징계와 전보, 승진 누락 등 인사권을 무기로 한 노동조합 탄압의 진상이 최근 법원 판결로 속속 단죄 받고 있다. 권 씨의 재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권 씨의 블랙리스트 작성이 “노조 소속 직원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게 돼 작성했다”는 개인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리스트를 만들게 했는지, 리스트를 추동하는 암묵적 분위기와 동조세력은 없었는지, MBC 전사적으로 작성됐던 블랙리스트의 실체, 경영진의 조합원에 대한 낙인찍기와 불법행위의 맥락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개인의 일탈과 뒤늦은 사과로 처벌을 피할 수 있다면 제2, 제3의 블랙리스트가 또 탄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다시 엄정한 법의 판단을 요청한다. 두 번 다시 MBC에 ‘블랙리스트’를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2020년 9월 7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