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탄핵, 세월호, 4대강, MB 정부 자원외교 등 수많은 아이템에 가해진 검열과 불방 조치. 급기야 사측은 노동 문제를 다루려던 <PD수첩> 제작진들을 ‘민주노총 청부인’으로 몰아붙이는 부당노동행위까지 저질렀습니다.
제작 자율성 침해와 검열에 항의하며 <PD수첩> 제작진들이 금요일부터 제작 중단에 들어갔습니다.
보직부장인 시사제작3부장도 보직을 사퇴했습니다.
오늘 아침 피케팅 장면입니다.
오늘 오전 기자회견입니다.
[기자회견문]
저희는 PD수첩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저희는 방송을 만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2번째 방송을 만들기 위해
201. 길었던 2012년의 170일 파업이 끝난 이후 저희 PD수첩 제작진들이 오늘까지 만든 방송의 숫자입니다. 무려 5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건들이 유난히도 많았던 그 5년 동안 저희 PD수첩은 사안의 핵심을 파고드는 취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201번의 방송을 했습니다. ‘아직도 PD수첩 방송이 나가기는 하냐?’는 질책에 ‘예, 우리 PD수첩 방송 잘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할 수 없었던 부끄러운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파업 전후로 회사는 PD수첩 PD 절반 이상을 해고하거나 징계하고 타부서로 발령 낸 후, 그 빈자리를 파업 중에 뽑은 대체인력들로 채웠습니다. 그들이 회사의 입맛에 맞는 PD수첩 방송을 만드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제작 현장에 남은 저희들은 ‘해야 하는 아이템은 못하더라도, 해서는 안 될 아이템이 방송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회사의 징계와 부당인사 앞에 무력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PD수첩이 최악의 방송을 하지는 못하게 버티자며 견딘 지난 5년입니다.
그러나 결국 오늘 저희 PD수첩 제작진들은 202번째의 방송 제작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방송을 만들 수 없는 PD로서의 날들이 시작됐습니다. 두렵습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입니다. 앞으로 회사가 저희에게 가할 일들을 생각하면 아득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PD수첩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맑은 양심으로 우리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에 맞서려 합니다.
–‘당신들은 민주노총 청부업자’라는 극언
저희 제작진은 8월 1일 방송을 위해 ‘한상균을 향한 두 개의 시선’이라는 제목의 기획안을 제출했습니다. 최근 대법원에서 실형 확정 판결을 받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이야기를 고리로 삼아, 한국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취재하려던 기획입니다. 최근 불거진 한 국회의원의 노동자 비하 발언, 집배원 자살,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낸 버스기사, 최저임금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노동 문제는 1990년 5월 첫 방송을 시작한 PD수첩이 지난 27년간 숱하게 다뤄왔던 아이템이고, 앞으로도 다뤄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조창호 시사제작국장과 김도인 편성제작본부장은 이 아이템에 대한 취재를 막았습니다. 방송심의규정 제9조 4항을 들먹이면서 말입니다. “방송은 당해 사업자 또는 그 종사자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되는 사안에 대하여 일방의 주장을 전달함으로써 시청자를 오도하여서는 아니된다.”라는 규정을 근거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문제에 있어서 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PD들은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되기 때문에 취재를 불허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PD수첩 제작진이 노조 조합원이기 때문에 노동문제에 있어서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라면, 똑같은 논리로 MBC는 노조가 있는 사업장의 ‘사용자’이기 때문에 역시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입니다. 회사 측 주장대로라면, 사실상 대한민국의 노조가 있는 모든 방송과 신문사는 노동문제에 관한 취재를 해선 안 될 겁니다. 말이 안 되지요. 회사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방송사가 PD의 취재를 막기 위해 동원한 논리의 수준이, 참담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회사의 주장 자체가 부당노동행위라는 점입니다.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취재 자체를 못 하도록 한 것은, 노동문제를 취재하려면 노조를 탈퇴하라는 요구에 다름 아닙니다. 부당노동행위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까지 받은 회사에서 여전히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살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더군다나 회사는 시사제작국 명의로 해명서를 발표하며 저희 제작진의 기획의도를 무시하고 방송이 일방적인 의견을 담아 한상균 위원장의 구명을 요구하는 내용이 될 것이고 심지어 PD수첩이 ‘민주노총의 청부 제작소가 될 것’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는 양심과 상식에 따라 어떠한 편향도 없이 프로그램을 제작하고자 하는 저희 제작진에 대한 모욕입니다. 지난 10년 방송을 사유화하고 권력의 안위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던 장본인들이 어찌 청부 방송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만약 시사제작국장이나 편성제작본부장이 정말 심의규정 9조 4항을 지키고자 한다면, PD수첩 제작진의 방송을 막을 것이 아니라 MBC 경영진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보도해온 MBC 뉴스의 행태부터 비판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MBC를 비호하는 MBC 뉴스를 문제 삼은 적 없습니다. 지난 5년, MBC에 대한 시청자 신뢰도가 떨어지고 시청률이 추락하는 동안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보직은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자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바람이지만 말입니다.
–‘세월호는 국가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말장난
세월호 참사는 PD수첩이 얼마나 끔찍한 지시와 저열한 방해 속에서 제작되고 있었는지를 보여드릴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세월호 침몰 6일째가 되던 2014년 4월 22일, 세월호 방송을 몇 시간 앞두고 최종 편집에 몰두하던 당시 제작진에게 이해할 수 없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유가족이 우는 장면을 최대한 삭제하라”는 겁니다. 제작진은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이 우는 걸 빼라면 어떡합니까?”라며 저항했지만 팀장 지시 이후 몇 장면이 삭제되었습니다. 일종의 보도지침, 그리고 그에 대한 제작진의 저항 이후 3년간 시사제작국장들은 세월호를 다루겠다는 PD들의 기획을 모두 막아섰습니다.
지난 4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나서야 세월호를 취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101분의 기록> 편입니다. 그러나 이 방송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검열은 이어졌습니다. 시사제작국장은 ‘국가’와 ‘청와대’라는 말을 삭제하라 지시했습니다. 내레이션에서 ‘국가’를 삭제하라고 압박하며 시사제작국장은 ‘제작진이나 국민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국가 탓만 해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의 문제로 봐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세월호 사고 직후 국가안보실과 해경 본청과의 통화 내용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국가안보실이 청와대 소속이 확실하냐’고 물으며 청와대를 뺄 것을 집요하게 강요했습니다.
논리의 탈을 쓴 망언들로부터 방송을 지키기 위해서 저희 제작진은 나름의 싸움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언론인으로서의 존재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방송심의규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방송사의 국장과 본부장을 상대할 때마다, 세월호는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장난으로 방송을 망치는 자들을 상대할 때마다 ‘이런 자들을 책임자로 앉혀 놓은 회사에서, 도대체 PD로 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섰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을 지켜야한다는 마지막 사명으로 버텨왔습니다.
–다시 PD수첩을 만들고 싶습니다.
회사는 PD수첩 방송을 막았습니다.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면, 시사제작국장과 편성제작본부장이 제작진과 한 테이블에 앉아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제작과 시사 과정에서 충분히 국장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음에도 취재를 원천 봉쇄하는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방송을 잘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PD들과, 방송을 만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손쉽게 불방을 결정해버리는 회사의 여유가 극명하게 대립합니다. 저희는 회사의 이런 태도가 방송을 사유화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방송의 진짜 주인인 국민들께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MBC를 사유화하려던 자들에게 맞서 싸웠고 끝내 해고된 최승호PD, 강지웅PD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PD수첩 제작진이었던, 그러나 쫓겨난 동료 선후배들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한 답이 그 표정들에 있습니다.
PD수첩 제작진
강효임, 김현기, 서정문, 소형준, 이영백, 전준영, 조윤미, 조진영, 최원준, 황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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